~2019
Illustration with poem, Digital work.

영혼은 보이지 않는 바람을 노 젓고 온다.  투명한 철새처럼, 메아리처럼 서서히 여기없는 세상의 모든 침묵을 일으켜 깨우고 불현듯 깊숙한 비밀에 착지하며 퍼덕거리다, 때로는 나 대신 끼륵끼륵 운다.

안리타, <예언> 중에서

누군가가 나를 향해 손을 펼친다면 손을 잡는다는 것은 그 길들을 걸어보겠다는 결기이니 긴긴 밤이 찾아오면 영원을 여행하자.

안리타, <잠들지 않는 세계>중에서


그대는 높은 담장 안 창문입니다.
거대한 벽 앞에 발 부르트던 나는
부르지 않아도 그대 곁에 다가가는 달빛입니다.

이정하, 창문과 달빛

왜 떡이 씁은데도 
자꼬 달라고 하오.

윤동주, 할아버지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자화상(自畵像)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 두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 옵기에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대로 빗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가옵니다. 

윤동주, 돌아와 보는 밤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歷史)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로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내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나서면 일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윤동주, 눈 오는 지도(地圖).
Back to Top